비올레타 차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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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올레타 차모로는 니카라과의 정치인이자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니엘 오르테가를 꺾고 당선되어, 니카라과 내전 종식, 징병제 폐지, 친미 정책, 경제 원조를 통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려 했다. 재임 기간 동안 외교, 경제, 여성 정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헌법 위기를 겪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재단을 설립하여 평화 및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며, 여러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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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차모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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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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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비올레타 바리오스 토레스 데 차모로 |
출생일 | 1929년 10월 18일 |
출생지 | 리바스, 니카라과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사망지 | 알려지지 않음 |
배우자 |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1950년 결혼, 1978년 사별) |
자녀 | 5명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민주해방연합 |
기타 소속 정당 | 국민야당연합 |
관직 | |
임기 시작 | 1990년 4월 25일 |
임기 종료 | 1997년 1월 10일 |
부통령 | 빌히리오 고도이(1990년–1995년) 훌리아 메나(1995년–1997년) |
이전 대통령 | 다니엘 오르테가 |
다음 대통령 | 아르놀도 알레만 |
임기 시작 | 1979년 7월 17일 |
임기 종료 | 1980년 4월 19일 |
2. 초기 생애
비올레타 바리오스 토레스는 1929년 10월 18일,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인 리바스에서 카를로스 호세 바리오스 사사카와 아말리아 토레스 우르타도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의 가족은 부유하고 보수적인 지주 가문으로, 대규모 토지와 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에서는 종종 그녀를 니카라과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묘사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실제로는 미국 서부의 대규모 목장주와 더 유사한 배경을 가졌다.
비올레타는 1949년 언론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을 만났고,[3] 1950년 12월에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다. 1952년, 남편 페드로는 부친의 사망으로 신문 ''라 프렌사''를 상속받아 발행인이 되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소모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남편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57년에는 소모사 정권에 대항하는 반란 시도 후 코스타리카로 망명해야 했다.
남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이 1978년 1월 10일 암살당한 사건은 산디니스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3] 그의 이미지는 산디니스타의 대의를 상징하게 되었고,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끄는 산디니스타 게릴라가 1979년 7월 마나과로 진격하여 승리했을 때, 차모로도 그들과 함께했다.[3] 소모사 정권을 대체하기 위한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차모로는 남편이 이끌었던 민주 해방 연합(UDEL, Unión Democrática de Liberaciónes)을 대표하여 첫 번째 국가 재건 위원회(JGRN, Junta de Gobierno de Reconstrucción Nacionales)에 참여했다. 이 위원회에는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es)의 오르테가, 산디니스타를 지지하는 국가 애국 전선(FPN, Frente Patriotico Nacionales)의 모이세스 하산 모랄레스, 니카라과 민주 운동(MDN, Movimiento Democrático Nicaragüensees)의 루이스 알폰소 로벨로 카예하스, 그리고 12인 그룹(El Grupo de los Doce, El Grupo de los Docees)의 세르지오 라미레스 메르카도가 포함되었다.[4]
1987년부터 14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합은 선거가 치러질 경우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을 꺾기 위해 협력하기 시작했다.[2] 1989년, 코스타리카 대통령 오스카르 아리아스와 다른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선거 실시에 동의했다. 그는 자유 선거뿐만 아니라 선거 과정에 대한 국제적인 감시도 수용했다. 국가 야당 연합(UNO)으로 명명된 이 야당 연합은 단일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방식에 합의했고, 5차례의 투표 끝에[2] 비올레타 차모로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90년 4월 25일, 비올레타 차모로는 마나과의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즈 경기장에서 약 2만 명의 군중 앞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이 사건은 니카라과 역사상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권 정부가 야당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사례였으며, 국민들의 높은 참여 속에 자유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교체된 첫 사례이기도 했다.[2] 차모로는 내전 종식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으나, 그 외 구체적인 정치 강령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속한 국민야당연합(UNO)이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정치 세력으로 구성되어 단일한 정책 합의에 이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사실상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유일한 공통분모였다.
그녀는 리바스의 사그라도 코라손 데 헤수스(Sacred Heart of Jesus) 학교와 그라나다의 프랑스 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마나과에 있는 콜레히오 라 이마쿨라다에서 중등 교육을 시작했으나,[2] 부모는 그녀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레이크 대학교 가톨릭 여자 고등학교에 다녔고, 1945년에는 버지니아에 있는 블랙스톤 여자 대학교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2] 그러나 1947년 6월, 아버지의 말기 폐암 진단 소식을 듣고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니카라과로 급히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3. 결혼과 가족 생활
차모로는 남편이 망명하자 자녀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코스타리카로 가 남편과 합류하여 2년간 함께 지냈다. 남편이 귀국 후 다시 투옥되는 등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는 동안, 차모로는 남편을 따라다니거나, 자녀들을 돌보고 남편을 면회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임대 부동산 수입은 이 시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8년 1월 10일, 남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이 암살당하자, 그녀는 ''라 프렌사''의 운영권을 넘겨받아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모로의 가족은 정치적 견해 차이로 나뉘었다. 자녀 중 페드로와 크리스티아나는 어머니와 함께 ''라 프렌사''에서 일했지만, 페드로는 1984년 콘트라에 합류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떠났다. 다른 두 자녀인 클라우디아는 산디니스타 정부의 코스타리카 주재 대사를 역임했고, 카를로스는 FSLN의 기관지인 ''바리카다''의 편집장을 지냈다. 이처럼 자녀들 간의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모로는 가족의 화합을 위해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정치적 소속을 잠시 잊도록 독려했다.
4. 정치 입문과 권력 장악
초기 위원회는 독립적인 사법부, 자유 선거, 자유 기업, 언론의 자유를 약속했지만, 산디니스타는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통제하고 신문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영향을 받아 쿠바식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니카라과는 점차 경찰 국가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산디니스타는 소련 블록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도 비동맹 정책을 표방하고 미국과의 관계 유지도 시도했다. 1980년 2월, FSLN이 소련과 여러 협정을 체결하자, 초기 산디니스타 정부를 지지했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CIA를 통해 반대 세력 지원을 승인했다.[5]
1980년 4월 19일, 차모로는 산디니스타의 권위주의적 통치 강화와 쿠바식 마르크스주의 도입, 그리고 민주주의 수립 약속 파기에 반발하여 국가 재건 위원회에서 사임했다.[3][4] 그녀의 사임은 다른 위원회 구성원들의 이탈을 유도하고 반대 세력 결집의 계기가 되었다. 차모로는 다시 《라 프렌사》의 편집장으로 돌아와 언론 자유와 반대 의견 개진을 강력히 옹호했다.[3] 그녀는 콘트라를 지지했는데, 이는 가족 내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두 자녀 페드로와 크리스티아나는 《라 프렌사》에서 일했지만, 페드로는 1984년 콘트라에 합류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떠났다. 다른 두 자녀 클라우디아와 카를로스는 산디니스타로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차모로는 가족 만찬을 주최하며 정치적 입장을 잠시 접어두고 화합을 도모하려 애썼다. 《라 프렌사》는 정부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고,[4] 1986년에는 오르테가 대통령으로부터 반역죄로 3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같은 해, 그녀는 "억압과 검열에 저항"하고 자유 언론에 헌신한 공로로 하버드 대학교 니먼 재단의 루이스 라이언스 상을 수상했다.[6]
1987년부터 14개의 야당이 연합하여 산디니스타에 대항할 준비를 시작했다.[2] 1989년, 오스카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을 비롯한 중미 지도자들의 중재 노력으로 오르테가는 자유 선거 실시와 국제 감시단 수용에 동의했다. 국가 야당 연합(UNO, Unión Nacional Opositoraes)으로 명명된 이 야당 연합은 5차례의 투표 끝에[2] 비올레타 차모로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녀의 주요 공약은 내전 종식과 의무 징병제 폐지였다.[2] 또한 그녀의 소박함, 신념, 상식과 더불어 '순교자의 미망인'이라는 이미지가 선거 운동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2]
당시 대부분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차모로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8] 그녀는 정치 경험이 부족한 부유층 인사로 묘사되었고, 미국 대사관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았다.[7] 또한 지나치게 종교적이며, 그녀가 이끄는 야당 연합은 조직력이 부족하고 내부 갈등이 심하다는 평가도 있었다.[8] 그러나 실제 선거 과정에서 그녀의 겸손함과 지방 출신 배경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가정을 꾸리고 사업체를 운영했으며, 국가 재건 위원회 초기 멤버로서의 경험도 있었다.[3][4] 또한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니카라과 국민 다수의 깊은 종교적 신념은 차모로의 신앙심과 자유로운 표현 옹호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고,[9]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평화를 약속한 것이 가장 큰 호소력을 가졌다.[2][10] 반면, 오르테가는 막대한 선거 자금을 사용하고[8] 승리를 장담하며 '마초 수탉'처럼 행동했고, 싸우는 수탉을 캠페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차모로의 당선을 위해 UNO 지원을 추진했다. 의회는 정당 직접 지원 금지 규정 때문에 직접 자금 지원은 거부했지만, 선거 감시 및 투표 독려 활동 명목으로 900만달러 지원을 승인했다.[11] 이 자금은 투표 인프라 구축, 차량 및 유류 지원, 선거 감시원 급여, 사무 장비 구입, 선거 관리 인력 교육 등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CIA 역시 해외 거주 니카라과인 약 100명에게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자 약 50만달러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은 순탄치 않았다. 선거 한 달 전까지 실제 전달된 금액은 40만달러에 불과했고, 니카라과 정부가 운영하는 중앙은행 계좌에 묶여 있었다.[12] 지원된 차량 역시 통관 지연 문제로 실제 사용되지 못했다.[13] 선거 3주 전, UNO 측은 약 25만달러만 받았다고 주장하며 오르테가 행정부의 방해와 자금 유용 의혹을 제기했다. 니카라과 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전례와 미국의 파나마 침공으로 인한 금융 동결 때문에 자금 집행이 지연되었다고 반박했다.[14]
1990년까지 니카라과는 40년간의 소모사 독재, 10년간의 내전과 산디니스타 통치,[15] 그리고 5년간의 미국 경제 제재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6] 1990년 2월 2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비올레타 차모로는 54.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0.8%를 얻은 현직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를 누르고 승리했다.[17] 이로써 그녀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는 에스키풀라스 평화 협정에 따라 미주 기구(OAS)와 유엔(UN)의 감시 하에 치러졌으며, 전직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아르헨티나 대통령 라울 알폰신, 콜롬비아 대통령 알폰소 로페스 미켈센, 코스타리카 대통령 로드리고 카라소 오디오 등 2,578명의 국제 참관인이 참여하여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엄격하게 감시된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9] 오르테가와 산디니스타 진영은 별다른 이의 없이 패배를 인정했고,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20]
차모로의 예상 밖 승리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당시 니카라과 국민들은 오르테가 정부의 경제 실정,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 제재, 그리고 격화되는 콘트라 반군 활동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1990년 1인당 국민 총소득은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24] 미국은 차모로가 승리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계속할 것이라고 공언했다.[25] 또한 콘트라 반군의 위협과 폭력 행위[26] 역시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많은 전문가들은 니카라과 유권자들이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적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변화를 선택했다고 평가한다.[23]
5. 1990년 대통령 선거
차모로의 선거 공약은 주로 내전 종식과 의무 징병제 폐지라는 두 가지 핵심 약속으로 이루어졌다.[2] 또한 그녀의 소박함, 신념, 상식, 그리고 남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의 암살로 인한 '순교자의 아내' 이미지가 선거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2] 당시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경험 부족과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으며 차모로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8][3][7] 그러나 그녀의 겸손함과 지방적 배경, 사업 경험, 초기 국가 재건 위원회 참여 경력 등은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요소로 작용했다.[3][4] 과거 미국의 니카라과 개입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점과 그녀의 깊은 신앙심, 언론 자유에 대한 옹호는 산디니스타 정권 하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많은 니카라과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9]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평화를 약속한 것이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2][10] 반면, 현직 대통령이었던 오르테가는 막대한 선거 자금을 사용하고[8] 싸우는 수탉을 선거 상징으로 내세우는 등, 승리를 자신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차모로의 승리를 위해 UNO에 대한 지원을 추진했다. 의회는 정당 직접 지원 금지 규정 때문에 직접적인 자금 지원은 거부했지만, 선거 감시 및 투표 참여 독려 활동을 명목으로 900만달러 지원안을 승인했다. 이 자금은 투표 인프라 구축, 선거 감시원 운영, 유권자 교육 등에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실제 자금 집행은 오르테가 정부의 행정적 지연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12][13][14] 또한 CIA는 해외 거주 니카라과인들의 귀국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약 50만달러를 비밀리에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차모로가 승리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25]
1990년 2월 2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미주 기구(OAS)와 유엔(UN)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철저한 감시 아래 치러졌다. 전직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아르헨티나 대통령 라울 알폰신, 콜롬비아 대통령 알폰소 로페스 미켈센, 코스타리카 대통령 로드리고 카라소 오디오 등 총 2,578명의 국제 참관인이 선거 과정을 지켜보았다.[19] 이는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감시된 선거 중 하나였다.
선거 결과, 비올레타 차모로는 54.74% (777,552표)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0.82%를 얻은 다니엘 오르테가를 누르고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17] 이로써 차모로는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오르테가와 산디니스타 측은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 절차에 협조했다.[20]
차모로의 승리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분석된다. 장기간의 내전과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15][16] 그리고 오르테가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자유 억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9] 또한, 콘트라 반군의 지속적인 활동과 미국의 군사 개입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26][27][28] 차모로가 내건 '평화'의 약속이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23] 선거 전 여론조사는 예측이 엇갈렸으나,[22][23] 결국 니카라과 국민들은 경제난 해소, 민주주의 회복,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차모로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평가된다.[9]
6. 대통령 재임 (1990-1997)
선거 결과는 전쟁 종식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함께, 당시 파나마를 침공하는 등 니카라과에 깊이 개입하고 있던 미국이 자국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위협을 끝내고 싶어 하는 민심이 반영된 합리적인 선택으로 분석되었다.[28] 산디니스타 측 분석가들 역시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며, 자신들이 지지자들의 염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선거 전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마빈 오르테가는 유권자들이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경제적 이유보다는 전쟁과 자유 억압에 반대하여 투표했다고 평가했다.[9]
차모로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평화 정착 노력으로 평가받는다.[18][29] 그는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다. 취임 당일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몇 주 안에 군 병력을 절반으로 감축했다.[30]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던 콘트라를 해체시켜 산디니스타가 싸울 명분을 없애고 실질적인 평화를 구축했다. 차모로는 정치적 범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면을 단행하여 산디니스타의 반발을 줄이고 원활한 정권 이양을 도모했다. 그는 분쟁 양측으로부터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지방 관리들의 협조를 구했으며,[30] 회수된 무기들은 마나과 시내에 조성된 평화 광장(Plaza de la Paz)에 콘크리트로 덮어 다시는 폭력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군축 과정에서 약 7만 명의 군인이 일자리를 잃는 등 부작용도 발생했다. 제대한 직업 군인들에게 약속되었던 주택, 토지, 금전적 보상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거나 일부에게만 편중되어 지급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92년 초까지 전직 장교의 5.8%만이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연줄이 있는 사람들만 군대에 남거나 보상을 받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1992년 4월부터 12월까지 전직 군인들의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일부 군 참전 용사(recompas)와 저항 참전 용사(recontras)는 재무장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곧 같은 처지에 놓여있음을 깨닫고 연대했다. 차모로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일부 전직 콘트라 전투원을 농촌 지역 경찰로 편입시키고, 경찰의 권력 남용 및 인권 침해 의혹을 조사하기 위한 시민 감찰관 제도를 도입했다.[33] 또한 산디니스타 정권의 농지 개혁 결과를 유지하도록 했으며, 참전 용사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카리브해 연안 지역으로 토지 분배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해당 지역 원주민들의 토지 소유권 주장과 충돌하고 삼림 보호 구역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2]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차모로는 결국 이 문제를 법원의 판단에 맡겼다.
차모로는 집권 초기부터 섬세한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국회 의장 선출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인 알프레도 세사르 아기레 대신 UNO가 지지한 미리암 아르구엘로를 받아들였다. 또한 산디니스타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비르힐리오 고도이 부통령과는 달리, FSLN과의 화해를 모색하며 다니엘 오르테가의 동생인 훔베르토 오르테가를 군 사령관으로 유임시켰다. 차모로 자신이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오르테가를 참모총장으로 두는 결정은[35]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국가 통합을 위해 기꺼이 타협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보로 평가받았다. 이 외에도 농지 개혁 담당자를 포함하여 3명의 FSLN 인사를 내각에 기용했다.
차모로는 1978년 소모사 독재 정권에 의해 남편 페드로 차모로가 암살된 후 정치에 입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다니엘 오르테가를 누르고 니카라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임기 만료 후 헌법 개정으로 재출마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1996년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해당 선거에서는 자유 연합(AL) 소속의 아르놀도 알레만 전 마나과 시장이 당선되었다.
6. 1. 외교 정책
비올레타 차모로는 집권 후 이전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친미 정책을 표방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차모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FSLN 정권에 부과했던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니카라과에 경제 원조를 약속했다. 또한 미국은 니카라과가 국제 통화 기금(IMF) 및 세계 은행 등 국제 금융 기구에 갚아야 할 연체된 부채를 변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차모로 측 일부에서는 내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미국으로부터 10억달러 규모의 원조를 기대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1990년에 3억달러, 1991년에 2.41억달러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미국의 원조는 니카라과가 겪고 있던 심각한 경제난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재협상된 대출은 오히려 니카라과의 부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차모로 대통령 임기 동안 미국의 니카라과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FSLN이 더 이상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미국 외교 정책 입안자들의 관심은 니카라과보다 중동 문제로 옮겨갔다.[36] 1991년 4월 차모로가 미국의 추가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 의회를 방문했을 때,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참석한 의원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차모로 행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 미국이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여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한 ''니카라과 대 미국'' 소송과 관련하여 국제 사법 재판소(ICJ)가 명령한 배상 요구를 포기하고 소송 자체를 철회하는 결정을 내렸다.[33] 미국은 5년 전 내려진 이 ICJ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미국의 보수적인 공화당 소속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은 니카라과 정부 내에 여전히 FSLN 인사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이유를 들어 니카라과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니카라과 정부가 FSLN 관련 인사들을 모두 해임하고, 혁명 기간 동안 미국 시민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등 내정 간섭적인 요구를 내놓았다. 헬름스의 주장이 미국 의회 내 여론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 정부는 결국 그해 니카라과에 약속했던 1.04억달러 규모의 원조 제공을 보류했다. 이는 차모로 정부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여 '니카라과 대 미국' 소송 관련 배상 청구를 포기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이루어진 조치였다.[37]
한편, 차모로 정부는 다니엘 오르테가 정권 시절 단절되었던 중화민국(타이완)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단교를 선언했다.[57] 이는 FSLN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친미 노선을 강화하려는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6. 2. 경제 정책
차모로가 대통령직을 맡았을 때 니카라과 경제는 내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상태였고, 1988년부터 시작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38] 차모로 행정부는 최우선 과제로 인플레이션 억제에 나섰다. 프란시스코 마요르가가 입안한 '마요르가 계획'은 신자유주의 모델에 기반하여 니카라과를 세계 시장에 다시 편입시키고, 외국 자본 의존도를 줄이는 동시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며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
정부는 먼저 국영 기업들을 'CORNAP'(Corporaciones Nacionales del Sector Público)이라는 지주 회사로 통합한 뒤 민영화를 추진했다. 1993년까지 CORNAP 소속 기업의 90%를 민영화하여 자본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제 진행은 더뎠다.[4] 또한, 새로운 통화인 ''코르도바 오로''를 도입하여 미국 달러와 1:1 가치를 갖도록 시도했지만, 새 통화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발행된 통화의 3분의 1만이 미국 자금으로 교환되어 은행으로 회수되었을 뿐이다.[5]
정부는 통화 가치를 절하하고 기본적인 소비재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등 긴축 재정 정책을 펼쳤다. 이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효과는 있었으나, 물가 상승, 민영화 과정에서의 대량 해고[38], 임금 동결 등으로 인해 중하층 및 노동자 계급의 큰 불만을 샀다.[6] 차모로 행정부 초기에는 교육 부문의 무료 버스 이용권, 노인 및 장애인 연금[39], 아동 보육 및 발달 서비스, 건강 관리 계획 등 사회 복지 프로그램 예산이 대폭 삭감되었다.[7] 1991년, 이러한 긴축 조치에 반발하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차모로는 민영화된 국영 기업 주식의 25%를 노동자들에게 배분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일부 기업을 국유화했던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은 민영화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노동자 이익 공유는 지지했다. 반면, 차모로의 연립 정부 내 극우 세력은 어떠한 형태의 노동자 타협에도 반대했으며, 미국 대사관과 USAID 역시 차모로의 타협적인 태도와 경제 계획 이행 속도에 불만을 표시했다.[40]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안토니오 라카요 오야웅렌이 주도한 국가 부채 재협상을 통해 비로소 통제되기 시작했다. 니카라과는 연체된 채무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국제 채무의 75%를 탕감받는 데 성공했다.[8] 미국은 니카라과가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 은행[9], 미주 개발 은행에 대한 연체 부채를 브리지 론을 통해 상환하고,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에 대한 부채의 95%를 탕감받도록 지원했다.[8]
이러한 조치들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키고 통화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높은 실업률, 불완전 고용, 전반적인 경기 침체라는 그늘에 가려졌다. 무역 적자는 증가하고 GNP는 감소했으며, 낮은 임금과 교육 및 의료 서비스 축소로 인해 빈곤이 심화되고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10]
결과적으로 비올레타 차모로 집권기는 니카라과에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쇠퇴를 가져온 시기로 평가된다. 1990년부터 2001년까지 니카라과의 인간 개발 지수(HDI) 순위는 세계 60위에서 116위로 급락했으며, UNDP는 니카라과를 아이티 다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평가했다.[41] 1인당 공공 의료 지출은 1989년 35USD에서 1995년 14USD로 급감했다. 출산 및 여성 암 진단 관련 의료 지원이 축소되었고, 1980년대에 설립되어 75,000명의 아동을 돌보던 아동 발달 센터들이 문을 닫았다. 기대 수명은 감염성 질환과 영양실조 증가로 1989년 66세에서 1996년 60세로 단축되었으며, 영아 사망률은 1990년 1,000명당 58명에서 1995년 72명으로 증가했다.[42]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1993년에서 1998년 사이 농촌 빈곤 인구가 155만 3천 명에서 151만 7천 명으로 약 7%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43]
경제 재건을 위해 차모로 정부는 친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전 산디니스타 정권 하에서 단절되었던 중화민국(타이완)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단교했다.[57]
6. 3. 헌법 위기와 정치 개혁
니카라과의 경제 문제 외에도 1995년에 발생한 헌법 위기는 국가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차모로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당시, 니카라과는 산디니스타가 제정한 1987년 헌법 체제 하에 있었다. 이 헌법은 행정부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규정하고 있었다.[44]
1993년, 입법부는 국가 정부 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헌법 개정 논의를 시작했다. 1년간의 토론 끝에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1차 투표를 거쳐 1995년 2월에 최종 통과되었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세금 부과 권한을 입법부로 이관하고, 징병을 금지하며, 재산권을 보장하고, 현직 대통령이나 그의 가까운 친족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4]
그러나 차모로 대통령은 입법부가 헌법 개정 권한을 넘어섰다고 주장하며, 개정된 헌법 내용을 관보인 La Gaceta|라 가세타spa에 공포하는 것을 거부했다.[44] 이에 맞서 입법부는 자체적으로 개정안을 공포했고, 이로 인해 니카라과에는 사실상 두 개의 헌법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대법원은 정족수 부족으로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없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입법부가 6명의 새로운 대법관을 임명하려 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면 새로운 헌법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임명을 거부했다. 차모로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의회의 개정안 공포를 무효화하려 시도했고, 이는 의회가 대법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국제 투자자들의 우려를 낳았고, 니카라과에 대한 추가 지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45]
이러한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인 미겔 오반도 이 브라보가 중재에 나섰다. 그의 중재를 통해 차모로 대통령과 의회는 타협안에 합의했다. 차모로 대통령은 법 절차에 따라 새 헌법을 공포하기로 동의했고,[46] 의회는 대통령이 법령이 아닌 협상을 통해 외국 원조 및 세금 관련 조치를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족벌주의 금지 조항에 대해서는 차모로 대통령이 양보했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지만,[45] 대법관 임명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의회는 자신들이 임명한 대법관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46]
이 위기 상황에서 타협을 이끌어낸 차모로 대통령의 능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합의를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는 더욱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되었고 권력을 분점하게 되었다. 국회는 예산을 편성할 권한을 갖지만 세금 부과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협의해야 했고, 대법관 임명은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의 동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법안 거부권을 유지했지만, 입법부는 단순 과반수 찬성으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변경 사항에는 형사 소송법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배심 재판 제도 도입, 시민의 고발권 확대, 경찰 권한 평가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과거 산디니스타 정권 시절 경찰과 군대에 의해 자행된 인권 침해나 폭력 행위를 조사하거나 관련자들을 사법 처리하는 데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로 인해 가해자들에게 사실상 면죄부가 주어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90년에 제정된 사면법이 정부의 기소 능력을 일부 제한한 측면도 있었지만, 과도기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 공정한 사법 시스템, 그리고 정치적 의지가 부족했던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산디니스타 계열 신문 Barricada|바리카다spa의 편집자였던 소피아 몬테네그로 등 일부 인사들은 차모로 대통령이 의지만 있었다면 과거의 인권 유린 문제에 대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베르나르도 옴바흐 주교와 같은 인물들은 차모로 대통령의 깊은 신앙심이 용서를 우선시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기소는 자칫 갈등을 연장시킬 수 있었고,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차모로 대통령이 추구했던 화해와 평화 달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6. 4. 여성 정책
차모로 정부 시기 국회의원 중 여성이 15명(16%)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권리 향상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차모로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으며, 개인적인 신념으로 인해 낙태, 동거, 피임, 이혼 등 전통적인 페미니즘의 여러 목표를 지지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녀의 정부가 추진한 보육 시설이나 재활 센터 같은 공공 서비스 예산 삭감은 저소득층 여성들을 매춘이나 범죄로 내몰기도 했다. 유엔(UN)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경제적 불안정은 여성과 청소년들을 소위 "거리 직업"으로 내몰아 안전 위험을 높였고, 학교 중퇴율, 약물 남용, 청소년 범죄 및 매춘의 증가를 야기했다.[47] 또한 무상 의료 폐지와 같은 긴축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산디니스타 노동자 중앙회(Central Sandinista De Trabajadores|센트랄 산디니스타 데 트라바하도레스es, CST)가 정부의 새로운 계획 하에서 의료 및 보육 서비스를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한편, 차모로는 여성이 이혼하거나 남편과 사별하여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보호 수단으로서 여성의 재산 소유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부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준비시키거나 장려하지 않았으며, 여성을 정부 고위직에 임명하는 데에도 소극적이었다.
차모로 정부의 경제 정책은 니카라과 노동력의 여성화를 가속했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남성의 고용률이 68%로 일정하게 유지된 반면, 여성의 가계 외부 고용은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에게 기대되는 가정 내 노동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율은 1977년 26.7%에서 1985년 32%로 증가했고, 1995년에는 36%에 달해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차모로의 정책은 더 많은 여성을 공식 노동 시장으로 이끌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소득 증가는 가져오지 못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되었고 1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1992년의 성범죄법 개정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기존 형법은 강간죄에 대해 8년에서 12년의 징역형을 규정했는데, 이는 단순 살인죄의 형량(6년에서 14년)과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었다.[48] 또한 이 법은 여성 본인의 권리보다는 아버지나 남편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처녀를 납치하는 경우 [...] 보호자가 부재하거나 폭력이 없는 경우"의 처벌은 가해자의 결혼 의사에 따라 달라졌다. 빅토리아 곤살레스-리베라(Victoria González-Rivera)는 1992년 개정 이전에는 강간이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었으며, 법이 피해 여성에게 가해자와 결혼하거나 금전적 합의를 하도록 유도했다고 지적했다. 차모로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국민의회 내 국민야당연합(UNO) 소속 여성 의원들과 FSLN 소속 여성 의원들은 힘을 합쳐 '여성, 청소년, 아동 및 가족 위원회'를 구성하고 성범죄법 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8명의 초당파 의원들을 설득하여 강간죄 형량 강화(15년에서 20년), 강간으로 인한 임신 시 낙태 비범죄화, 합의된 소돔 행위(동성 간 성행위) 비범죄화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통과된 법안에서는 강간 피해자를 위한 낙태 허용 조항이 삭제되었다. 또한 소돔 행위를 비범죄화하기는커녕, 기존 법의 처벌 범위를 확대하여 동성애 행위를 "유도, 조장 또는 선전"하는 행위까지 포함시켰다.[48] 이 새로운 반(反)소돔법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억압적인 법으로 평가받았으며, "스캔들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동성 간 성행위를 유도, 조장, 선전 또는 행하는 자"에게 최대 3년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49] 차모로는 이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거부하고, 법률 공포 요건인 관보(La Gaceta|라 가세타es) 게재를 지시하여 법을 발효시켰다. 변호사들이 즉시 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994년 3월 7일 대법원은 이들의 이의 제기를 기각했다.[48]
7. 퇴임 이후
차모로는 1997년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당시 니카라과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7월, 그녀는 평화 이니셔티브를 강화하기 위한 개발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Fundación Violeta Barrios de Chamorro|푸니다시온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es)을 설립하고 의장을 맡았다. 그녀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협력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카터 센터의 아메리카 대통령 및 총리 협의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4] 차모로는 또한 미주 대화의 회원이다.[50]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골다공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51]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녀는 골다공증으로 인한 무릎뼈 골절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목발에 의존했다.[2] 이후 뇌종양이 발생하여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났다.[17]
8. 수상 내역
연도 | 수상 내역 | 수여 기관/비고 |
---|---|---|
1986년 | 루이스 M. 라이언스 상 | 언론의 양심과 정직성 부문[53] |
1991년 | 민주주의 상 | 민주주의 기금[54] |
1997년 | 평화를 향한 길 상 | 평화를 향한 길 재단[55] |
2001년 | 글로벌 무역 리더십 상 | [56] |
(연도 미상) | 아이자이아 토마스 상 | 로체스터 공과대학교[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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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Stunning Ortega Defeat : Chamorro Elected in Voter Rebuke to Sandinistas : Transfer of Power April 25
https://www.latimes.[...]
199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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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니카라과 오르테가에 맞서던 차모로, 징역 8년형 선고받아
https://www.yna.co.k[...]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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